• 2023. 8. 31.

    by. 위드_길

    목차

       

      조선의 여러 계급의 교육 중에 가장 엄격했다고 하는 왕세자 교육은 어떤 모습이었을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조선시대 왕세자가 교육을 받는 모습은 TV 사극에서 보거나,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조선시대는 임금이 아들을 낳으면 장자가 세자책봉을 받게 되고 그 후에 한 나라를 이끌어가기 위한 훈련을 하게 됩니다. 이때 이루어지는 훈련은 문과 무를 골고루 갖추기 위해 체계적인 훈련을 받는다고 합니다. 어떻게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지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시대왕세자교육
      조선시대의 왕세자 교육

       

      왕세자의 일상이 교육이고 교육이 일상

      왕세자의 일상이 교육이고 교육이 곧 일상이었습니다. 왕비의 거처인 교태전에서 왕세자가 태어나면 바로 교육기관이 생겼습니다. 5살이 되기전의 유아기 왕세자는 보양청이라는 곳에서 머물게 되는데, 보양청이란 보좌하고 기른다는 의미로 오직 왕세자 한명을 보육하기 위한 곳이었습니다. 아직 왕세자의 직분을 받기 전 어린 원자와 원손을 양육하기 위한 보육기관으로 숙종이 경종을 위해 설치하도록 했습니다. 스승이 어린 원손을 보러 갈 때 원손의 또래친구를 한명 데려가는데 이 아이를 배동이라 불렀으며, 배동과 함께 놀게 하는 것은 사회성을 길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왕세자 교육은 아침에 일어나 부모님과 웃어른께 문안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왕세자는 아침에 왕에게 올려지는 수라상을 미리 살피는 시선과 왕이 병환 중에 먹는 약을 먼저 맛보는 시탕을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영조는 오랫동안 아버지인 숙종과 형이었던 경종의 시탕을 했습니다. 시선과 시탕을 마친 다음에는 비로소 아침에 받는 수업인 조강이 시작됐습니다. 시선과 시탕을 공부에 앞서하는 것은 효를 중요시하였던 조선에서 왕세자에게 좋은 품성을 갖게 하는 참 교육이었습니다. 왕세자는 제자로서 스승에게 예를 깍듯이 하여 대했습니다. 왕세자가 성균관에서 입학례를 치를 때, 스승 앞에서 무릎을 꿇고 바닥에 놓인 책을 읽게 하였기 때문에 왕세자에게는 책상이 제공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왕세자가 머물렀던 곳은 동궁이며, 주생활은 비현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비현각은 왕세자가 일을 할 수 있는 집무실도 되고, 공부를 하는 교실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왕세자는 스승을 만나기도 하였고, 개인 수업을 받기도 했습니다. 동궁 앞에 있는 세자시강원 혹은 춘방이라 불리던 건물은 조선 왕세자의 교육 기관으로서, 왕세자의 스승 시강관이 근무했고, 왕세자의 공부를 전담하는 관청으로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의 관리들이 머물렀던 곳입니다.

       

       

      왕세자 1인 vs 스무 명의 스승

      왕세자가 임금이 되는 훈련을 받기 위하여 동원된 스승은 모두 20명이었다고 합니다. 왕세자책봉이 되면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시강원이 설치가 되고, 시강원에는 정1품부터 7품까지 총 20명의 스승이 왕세자를 교육했습니다. 정1품의 영의정은 사(스승, 師)가 되었고, 좌의정이나 우의정 중 한 사람이 부(스승, 傅)가 되어, 이들이 왕세자의 사부가 되었습니다. 1626년에 소현세자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자 스승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집중하지 못하는 소현왕세자를 따끔하게 질책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왕세자 교육은 최고의 스승들이 동원되어 장차 한 나라를 이끌어 갈 왕세자를 교육하는데 힘썼습니다. 지금도 잘 알려진 스승으로는 인종왕의 원자 때 스승은 조광조였으며, 세자 때의 스승은 이황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왕세자의  야간 보충수업

      조선시대 왕세자가 야간 보충수업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 왕세자의 하루는 공부의 연속이었습니다. 바쁜 하루의 일과를 쪼개어 야간에 보충수업을 했을 정도로 교육의 양이 많았던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동궁의 일기에는 왕세자의 일상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현세자동궁일기」에는 왕세자가 어떻게 공부했는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받는 수업을 조강(朝講)이라 하는데 오전 7시부터 9시까지 2시간 공부하고, 낮에는 주강(晝講)이라 하여 또 수업을 받고, 저녁에는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석강(夕講)을 받는데 이것이 수업의 기본이었습니다. 그 외에 보충수업을 받았는데 하루에 한 번만 받는 것이 아니라 낮에 받는 보충학습을 소대(召對), 밤에 받는 보충학습을 야대(夜對)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2시간 동안 보충학습을 하여 하루에 두 차례씩 보충 수업이 있었습니다. 왕세자를 가르치는 스승은 세자시강원에서 숙직을 하며, 24시간 왕세자를 교육했습니다. 왕세자가 머물던 곳을 동궁이라고 하는데 동궁은 작은 기숙사의 역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왕세자가 해야 할 일은 교육을 받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는 것처럼 왕세자도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전날 배운 것에 대한 평가를 마쳐야만 진도를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달 두 번씩 회강이라 하는 시험이 있었는데, 회강은 그동안 배운 내용들을 스승들 앞에서 복습하는 형태로 치르는 시험이었습니다. 회강은 임금이 참석하는 경우도 있었고, 20여 명의 스승 앞에서 혼자 치르는 시험이었습니다. 

       

       

      왕세자의 조기교육과 암기

      왕세자들은 일찌감치 조기교육을 받았으며, 암기의 중요성을 배웠다고 합니다. 왕세자들이 공부를 시작한 나이는 평균적으로 5세의 나이였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 왕들의 학업에 대하여 기록한 「열성조계강책지차제」에 보면, 왕세자의 나이 평균 5세 때에 강학철이 설치되었고 왕세자 교육이 시작되었음을 알게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기교육을 시작하면서 초학의 교재로는 효경소학, 소학초략, 소학, 동몽선습이 있었고, 8살 이후에는 대학과 사서삼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가장 어린 나이인 3세에 효경소학을 배웠고, 5세에 소학초략을, 7세에 동몽선습, 8세에 소학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정조는 4세에 효경소학을 공부했는데, 영조는 손자인 정조를 교육할 때에, '내가 일찍이 소학을 100여 번 읽었기 때문에 지금도 기억하여 외울 수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암기교육을 강조했습니다. 왕세자는 경전을 공부할 때 경전의 문구를 보지 않고 통째로 암기하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유학을 배울 때에 암기를 하는 것은 경전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이었습니다. 암기하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고, 그러므로 실천할 수 없다 하고 가르쳤으며, 이것은 전통교육의 철학이었습니다. 

       

       

      지덕체에 능한 왕세자

      왕세자가 왕이 되기 위해서는 지덕체에 유능해야 했습니다. 정조는 문무를 잘하는 유능한 군주였습니다. 화살을 50발을 쏘면 49발을 명중시킬 정도로 활쏘기에 잘했습니다. 또한 개인문집 홍재전서를 180여 권, 4천 여권의 서적을 편찬할 정도로 뛰어난 학식이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종묘제례악을 하룻밤 만에 작곡했다고 전해집니다. 세종은 조선 초기 학술, 문화, 과학, 군사 부분의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정조나 세종이 뛰어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왕세자일 때에 받았던 교육이 지덕체가 골고루 균형을 이룬 교육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다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기본적인 것으로 여섯 가지가 있는데, 예법과 음악, 글쓰기, 활쏘기, 말타기, 수학입니다.  왕세자는 여섯 가지 예법을 고루 갖추고 능한 교양인으로 성장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