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8. 30.

    by. 위드_길

    목차

       

      조선시대에 영어 공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영어의 광풍이 일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신분사회인 조선에 서양언어인 영어의 광풍이 일게 된 이유와 어떤 방식으로 영어를 배울 수 있었을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이 글을 포스팅하면서 처음 알게 된 내용이어서 재미있고 호기심 가득하게 공부했습니다.

       

       

      조선시대 영어교육
      조선시대의 영어 공부

       

       

       

      조선과 미국: '조미수호통상조약'

       [조미수호통상조약]이란, 1882년에 조선과 미국이 국교와 통상을 목적으로 맺은 조약으로, 조선이 서양과 맺은 최초의 조약입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을 때 조선은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통해 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에서 파견되었던  파견 대사는 신 헌이었고, 미국에서 나온 대표는 로버트 슈펠트 제독이었는데, 두 나라 간 언어가 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말과 영어가 가능했던 청나라의 마건충을 통역사로 세웠습니다. 한국의 대표 신 헌이 이야기하면 청나라의 마건충이 영어로 전달하고, 미국대표 로버트 슈펠트 제독이 이야기하면 다시 한국 대표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체결조약을 맺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때까지 조선에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은 독립된 국가로서 불평등을 배제한 조건으로 맺은 최초의 조약이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조선과 중국 간의 종속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가진 국제사회 속의 국가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가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시작했음을 규정합니다.

       

       

      조선 시대 영어가 필요했던 이유

      조선 시대에 영어를 꼭 배워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은 모두 14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조약내용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 12번째 조항 내용을 보면, 「제12조 5년 후 양국관민이 각각 언어에 익숙하게 되었을 때 만국공법의 통례상 공평하게 상의하여 상세한 통상조관 및 규칙에 관하여 재교섭한다.」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이때 조약을 맺기는 했지만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세부 조항은 조선이 영어에 익숙해질 때 다시 진행하기로 한 것입니다.

       

       

      조선 통역관양성소 '동문학' 그리고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2조의 내용에 대해 문화적인 충격을 받았던 조선은 그다음 해인 1883년 통역관을 양성하는 '동문학'이라는 학교를 설립하게 됩니다. 한발 더 나아가 양반가의 자제들에게 영어교육을 하는 공립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세워서 영어교육을 실시하게 되는데 그 당시 영어는 조선이 국제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언어였으며, 그때부터 영어 열풍이 생겨났습니다. 문헌에 보면 1797년 부산에 정박한 영국 함대에 올라 영국인을 만났던 관찰사 이형원은 말이 통하지 않자 영국인에게 글로 적어 달라 했는데, 그 글을 본 이형원은 마치 구름을 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고 합니다.

       

      '배재학당'은  조선 최초의 사학으로, 미국인 감리교회의 아펜젤러 목사님에 의해 설립이 되었으며, 설립을 도운 사람은 김옥균이었습니다. 배재학당은 고종이 직접 이름을 지었습니다. 배재학당의 이름의 뜻은 '영재를 길러내는 집'이라는 뜻으로, 당시 고종이 얼마나 인재를 길러내는 데 열정을 가지고 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배재학당은 육영공원이 설립되던 같은 해에 문을 열었고, 육영공원이 양반가 자제들의 영어교육을 위한 것이라면, 배재학당은 일반 백성들까지 영어를 공부할 수 있도록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서양인에게 배타적인 분위기 때문에 학생 모집이 어려웠으나, 2년이 지난 뒤에는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효과로 학생이 60명으로 늘었습니다.

       

      '이화학당' 역시 배재학당과 같은 해에 문을 열었습니다. 이화학당은 그동안 교육에서 소외됐던 여성들을 위한 학교였습니다. 이곳 역시 원어민 선교사들이 영어로 교육하였고, 형편이 어려웠던 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영어 교육방식과 열풍

      조선시대에 영어를 배웠던 방식은 다름 아닌 19세기말부터 조선에 들어와 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기독교의 전도활동을 엄격하게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고종과 개화 세력은 영어와 신식 교육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미국인 선교사들이 의료와 교육활동을 하는 것을 도왔고,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이때 미국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가 배재학당이었는데, 김옥균이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조선시대에 영어교육이 가능했던 이유가 바로 미국인 선교사를 통한 영어교육은 물론, 1:1 대화중심의 교육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학생들의 영어실력이 매우 우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901년 일본인 시노부 준페이가 쓴 책 [한반도]에 수록된 내용으로 '재작년 영국 영사가 본국에 보고하기를 조선 사람은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어학자로 그 뛰어남은 감히 따르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되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어는 신분사회였던 조선에 변화의 바람이 일게 됐고, 영어를 배우고자 하는 열망은 서민에게까지 옮겨갔습니다. 다산 정약용이 써서 당시 서당의 대표적인 교재로 사용되었던 아동용 한자 학습서 「아학편」이 있었는데, 이것을 개화기 학자인 지석영이 새롭게 펴냈습니다. 새롭게 펴낸 「아학편」에서 지석영은 각 한자마다 해당하는 영어발음을 한글로 적었습니다. 비록 표기된 영어발음은 부족한 수준이었으나 영어교육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어에 관심이 많아지자 영어교육을 하는 곳도 많아졌고, 영어를 배운 조선인들의 실력도 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