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8. 23.

    by. 위드_길

    목차

      통일신라 시대 교육 역사의 시작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때부터 시작하여 고려가 세워질 때까지를 통일신라 시대로 보고 그 시대의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기본적으로 삼국이 통일되기 전의 신라와 통일된 이후의 사상과 교육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됩니다.

       

       

      통일신라 교육

       

       

      통일 신라 시대의 시대적인 배경

      통일 신라의 시대적인 배경은 삼국시대 간 경쟁을 해야 했던 시기와는 다른 배경을 갖게 합니다. 통일하기 전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와 끊임없이 경쟁을 하기 위해 화랑도라는 문무를 겸비한 청소년단체가 있었고, 불국토 사상에 의해 발전이 되었습니다.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당과 연합을 했고, 그다음에 고구려를 물리쳤습니다. 그 후에 당나라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려고 해서 신라는 일부지역에서 당나라와 전쟁을 벌였고, 점차 신라는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는 데에 성공을 하게 됩니다. 신라가 당을 물리친 것은 커다란 의미를 가집니다. 한반도를 향한 중국의 욕심을 애초에 잘라냄으로 민족적인 위기를 잘 이겨냈다는 점이 중요하며 이것은 곧 한민족을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기반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통일 신라는 한반도 넓은 영토와 국민을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조직적인 개편이 필요했습니다. 통일 신라를 하나의 국가 형태로 발전시키기 위해 학교 교육이 필수적으로 필요했는데, 이러한 배경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교육기관인 '국학'입니다.

       

       

      통일 신라의 교육

      삼국이 통일되기 전의 신라와 삼국이 통일된 이후의 신라의 교육과 사상은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통일 전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늘 경쟁상황에 있었고, 언제든지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문무교육이 함께 이루어졌고, 신라에는 '화랑도'라는 청소년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있었습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나라를 이끌어야 했고, 국민들도 그만큼 많아졌기에 국가경영을 위한 조직적인 관리를 양성해야 한다는 것과 더불어 유교적인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교육이 필수였습니다. 따라서 중앙과 지방에 교육기관을 설립했고, 또한 중국식 교육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국학

      '국학'은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서 유교 진흥책 중의 하나입니다. 신문왕 2년에 설립된 '국학'이라는 명칭은 중앙의 학교를 뜻하는 이름이며, 지방의 학교는 '향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습니다. 즉, 국학은 나라 중심(수도)에 있는 것으로 최고의 학부를 뜻합니다.  당에도 국학이라는 명칭이 있어서 간혹 헷갈려하는 부분이 있는데, 당의 국학은 그 당시 당의 최고학부인 '국자감'을 국학으로 칭하기도 했지만, 통일 신라의 국학은 그것 자체가 고유 명칭이었습니다. 물론 신라의 국학이 당의 국자감을 축소시켜 놓은 형태의 학교였다는 증거는 있습니다. 통일 신라의 국학은 3개의 학관에서 유교경전과 기술교육을 실시했다면, 당의 국자감은 6개의 학관 중에 3개의 학관은 유교경전을, 3개의 학관은 기술교육을 실시한 것으로 보아 국학이 국자감의 축소판 학교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국학의 교육과정에는 「논어」와 「효경」으로 이루어진 필수과목과 「예기」와 「주역」, 「좌전」, 「모시」, 「상서」, 「문선」으로 이루어진 유교경전을 교육하였습니다. 국학을 이끄는 교수로는 박사와 조교가 있었고,  국학에 입학할 수 있는 사람은 15~30세의 대사(17관등 중 12등위)에서부터 벼슬이 없는 자까지 가능했으며, 9년의 수업연한을 거치면 졸업이 가능한데, 졸업의 요건은 학생의 관등이 다나마(17관등 중 10위)나 나마(17관등 중 11위)에 올라야 하므로 관위가 높은 자일수록 졸업이 쉬웠습니다. 입학과 졸업여건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엄격했던 골품제사회에서 5두품 출신의 학생들이 6두품 출신의 학생들만 가능했던 대마나나 나마 관등에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학식 있는 자를 관리로 등용하여 혈통을 중시했던 종전의 세습적인 관직제도를 개혁하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 독서삼품출신법 

      국학에는 '독서삼품출신법'이란 통일 신라에서 시행된 최초의 관리선발제도입니다. '독서삼품출신법'은 국학에 다니는 학생들의 졸업시험과 동시에 관리직에 나아갈 수 있는 관리 임용시험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신분상승의 기회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학업에 대한 의욕과 기대감을 가지게 했으며, 국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의 질을 관리학 하는 제도였습니다.

       

       

       

      통일 신라의 유학생 파견(숙위학생 제도)

      통일 신라 시대에 유학생을 파견하는데, 유학을 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상층 계급이었던 왕족의 자제들부터 6두품 출신까지로 추정합니다.  주로 당에 국비로 유학생을 보냈는데, 100명에 이르는 많은 학생들을 보낼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유학을 마치게 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국내로 돌아왔지만 당에서 실시하던 외국인시험에 합격하여 당에서 벼슬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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